추억팔이

crossin/하루

몇 시간 째, 지난 시간들을 훑고 있다.

추억팔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추억팔이.. 나한테 팔고 있는 건가.

지난 시간들을 최대한 예쁘고 아련하게 반짝반짝 갈고 닦아 나한테 다시 팔고 있다.

지금의 너는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과거의 너는 반짝반짝하니 아주 예뻤다고.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찬란한 과거를 가졌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자위하고 있는 것인감.

 

'crossin >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동안의 일  (0) 2015.01.29
8일 밤과 9일 새벽 사이  (0) 2015.01.10
14-15  (0) 2015.01.01
월요일  (0) 2014.12.26
2014  (0) 2014.12.13

14-15

crossin/하루

새해의 첫 날을 버스에서 맞았다.

마지막 날을 버스에서 보냈다.

 

길 위에서 새 해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약간 긴장을 했다.

함께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략 열 명 정도. 버스 바깥에도 차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새 해를 맞는구나.

이렇게 길을 가다 열두시 땡 하면 뭔가 이벤트가 있을까 궁금했다.

누군가 클락션을 울린다거나, 깜빡이를 켠다거나 하는.

하지만 그런 이벤트는 없었다.

 

여느 날과 똑같은 자정. 똑같은 고속도로. 똑같은 버스. 똑같은 사람들.

 

집에 돌아와 2015년의 첫 맥주를 개봉하고 마시고 인터넷을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올 한 해는 나에게 너무 버거웠다.

줄줄이 일어난 대형 사고들, 개인적인 절망들, 동경하는 사람의 죽음.

한 해에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은, 큰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한 해가 더 길게 느껴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벌써 14년 초에 있었던 일들이 몇년 전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열 두시가 지나고, 이제는 2015년이니까 2014년의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절망을 느낀다. 2015년의 첫 절망.

 

친구와 꼭 합격하자는 약속을 했다.

올해의 첫 약속.

 

연말 선물을 준 친구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올해의 첫 편지.

 

그리고 이것은 올해의 첫 글.

 

쉬엄쉬엄, 마음 가는대로, 그래도 꾸준히 일 년을 보내보고 싶다.

그렇게 14년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내년을 맞고 싶다.

올 해처럼 무겁고 힘든 마음을 짊어진 상태가 아니라, 가볍고 소란한 마음으로 '야 이제 병신년이래'하며 낄낄거리고 싶다.

 

 

'crossin >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일 밤과 9일 새벽 사이  (0) 2015.01.10
추억팔이  (0) 2015.01.05
월요일  (0) 2014.12.26
2014  (0) 2014.12.13
  (0) 2014.12.08

141230

street/흔적


141230 은평구 어드메

'street >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50201  (0) 2015.02.06
201412??  (0) 2015.02.06
141223  (0) 2014.12.24
141124  (0) 2014.12.14
141127  (0) 2014.12.06

월요일

crossin/하루

 

월요일은 술이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요일이다.
내일은 화요일 모레는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금요일이니까.
그래서 다들 술을 마시고 막차를 탄다.
내일 새벽 여섯시 다시 출근 전쟁을 치뤄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오르자 각종 안주 냄새와 술 냄새가 코 속에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누군가가 버스에 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오늘 삼킨 술과 안주 냄새를 자신의 날숨과 함께 뱉어내고 있다.

'crossin >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팔이  (0) 2015.01.05
14-15  (0) 2015.01.01
2014  (0) 2014.12.13
  (0) 2014.12.08
다짐  (0) 2014.12.07

3.

crossin/사람

그는 캐리어를 들고 다닌다.

캐리어 안에는 배낭과 책 몇 권이 들어있다.

그가 읽는 책에는 공부법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동두천 꿈나무 정보 도서관에서 빌렸다.
그는 지금 분당선에 앉아 그 책을 읽고 있다.

그는 모든 짐을 캐리어에 넣고, 캐리어를 책상 삼아 책을 읽는다.
그는 두꺼운 겨울용 자켓과 뭔가가 군데 군데 묻어있는 얇은 바지를 입고 있다.
그의 나이는 사십대 중후반 즈음으로 보인다.

그의 머리는 가운데가 휑하게 벗겨져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옆자리 여자와 부딪힐 때 조금 짜증이 나긴 하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는다.
좁은 전철에서도 캐리어를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고, 팔짱을 끼고 사방으로 머리를 돌려가며 졸 수 있다.
잠시 졸다 깬 그는 다시 책을 꺼내 든다.
그는 움직이는 전철에서 책을 읽는다.
수험공부를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인지 알려주는 책을 읽으며 대모산 입구를 지나고 있다.

'crossin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 종일  (0) 2016.06.12
흡연자  (0) 2015.09.12
그녀의 엘리트주의  (0) 2015.06.29
2.  (0) 2014.12.26
1.  (0) 2014.12.26

2.

crossin/사람

그녀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산다.
아들은 수도권 사립 대학의 교수이고, 며느리는 주부이다.
그녀는 스물 한 살 열 아홉 살인 손자가 둘 있는데 모두 미국에 있다.
그녀의 남편은 십 이년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로 혼자 살다 삼개월 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 되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버는 아들은 언젠가부터 아들이 아니라 어려운 선생님 같다.
차분한 성격의 며느리에겐 왠지 눈치가 보인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포함하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사람들 중 편한 사람이 없다.

그녀는 매일 동묘로 간다.
매일 아침 9403 버스를 탄다.
9403 버스는 그녀의 집 앞 정류장을 종종 지나쳐버린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그녀는 정류정 옆 가로수에 꽂혀있은 무가지들을 본다.
구인구직 정보가 담겨있는 신문에 시선이 머문다.
무거운 관절을 움직여 무가지를 집어드는 순간, 그녀가 타고자했던 버스가 지나간다.
당황한 그녀는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한다.
그녀의 엉거주춤을 보고 옆자리 젊은 여자는 민망해한다.
그녀는 민망한 감정 보다는 속상함이 더 크다.

'crossin >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 종일  (0) 2016.06.12
흡연자  (0) 2015.09.12
그녀의 엘리트주의  (0) 2015.06.29
3.  (0) 2014.12.26
1.  (0) 2014.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