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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in/하루

2년 쯤 전에 아주 과제가 많은 수업을 동시에 여러 개 들었다. 일주일에 각기 다른 주제로 글을 두 세 편씩 써야 했는데, 일기도 쓰지 않는 나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질은 보장하지 못해도 기한을 넘기지는 않는 것을 목표로 한 학기를 보냈고, 결과적으로 성공하기는 했다. 이런 영양가 없는 성실함은 질 낮은 글을 마구 쏟아내게 했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것 자체를 덜 무서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때는 A4 한 두 페이지 정도는 정말 쉽게 쓸 수 있었다. 물론 부족한 글이지만은.

그런데 그마저도 안 하게 되니, 이제는 글의 질도 양도 기준 미달이다.

졸업 논문을 쓰면서 뼈저리게 느꼈는데, 개요를 짜는 것 부터가 너무나 어렵고, 이 주제로 쓰면 어느 정도 분량이 나오겠다는 감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결국 졸업 논문 제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다 지금 어느 정도의 질이 요구되는, 분량이 정해져있는 글을 써야 하는데 쓰기 싫기도 하거니와 안 써진다. 보통 어느 정도 쓰고 나면 '이 정도 분량이겠거니' 하는 감이 오는데, 적당히 쓰고 확인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분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더 이상 손을 대기도 싫어 그냥 미뤄두고 있다.

과제라는 것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나보다. 그 많은 보고서들을 다 어떻게 써 왔던 건지, 과거의 내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때 써뒀던 글을 보면 영구 삭제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쓰고는 한다.

 

나는 성실하다는 평을 종종 듣는다.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결석한 날은 하루도 없다. 물론 지각은 종종 했다. 그러나 나에게 이것은 성실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나에게 있어서 성실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을 기한에 맞게 제출한다고 해서 성실한 게 아니라, 기한에 맞춰 열심히 써야 성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성실하지 않고, 이렇게 정신은 빼두고 몸만 왔다갔다 하는 것을 굉장히 바보같은 일이라고 자책하면서도, 결국 그 시간에 꼭 그 자리에 가게 된다. 시간과 돈(교통비)를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는데, 이 글을 쓰다보니 그것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희망이 생긴다. 하지만 아닐 것을 안다.

아 그런데 오늘 결석했다. 와. 맞네 오늘 결석했다.

계절학기 청강 수업이었는데, 마지막 날이었는데 결석했다. 의미있는 날이군. 그런데 그 수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나는 이 강박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다 성실한 것이라고, 좋은 자질이라고 말해주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면 그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있어. (미안)

지각도 하고, 약속도 마음대로 펑크내고 싶다. 잠수도 타고 싶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다 안 해버리고 싶다.

2월은 그래봐야지.

그런데 오늘 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모임을 계획해봤다.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글은 쓰고 싶다. 아니 글을 잘 쓰게 되고 싶다. 글을 잘 쓸 수 있게 무언가를 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 니가 해야 하는 것부터 하란 말이야. 발제문을 어서 완성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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